다자이 오사무의 생가이자, 국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된 호화 저택. 당시의 생활과 작품 세계를 접할 수 있다.
다자이 오사무가 태어나 자란 호화 저택은 메이지 시대에 지어진 이 지역 유수의 대지주였던 다자이의 아버지 저택이다. 부지 내에는 쌀 창고도 있으며, 당시 이 집에 6,000가마 이상의 쌀이 모였다고 한다. 다자이 오사무 기념관 '사양관'에서는 다자이가 지냈던 방이나 작품에 영향을 주었을 풍경을 체험할 수 있다. 귀중한 자료와 유품, 사진 등을 전시하고 있어, 다자이 문학의 세계에 몰입할 수 있다. 관내에는 음성 가이드도 준비되어 있어, 더욱 깊이 다자이 오사무의 생애와 작품에 대해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다자이의 생가였던 '사양관'은 메이지 40년에 지어진 당시 시가 8억 엔 상당의 호화 저택이다. 부지 내에는 쌀 창고도 있어, 매년 수확 시기에는 6,000가마 이상의 쌀이 모였다고 한다. 다자이는 11남매 중 10번째, 6남이었다. 장남 중심의 시대였기 때문에 아버지와 같은 식탁에 앉을 수 없었다. 식사는 별실에서 하는 것이 당연했으며, 다자이는 쌀 창고 앞 돌계단에서 식사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전후 농지 개혁으로 다자이의 생가는 가지고 있던 농지를 잃는다. 그 결과, 이 광대한 저택을 유지할 수 없게 되어 1950년에 처분한다. 그 후 이 저택은 1996년까지 '사양관'이라는 여관으로 운영되었지만, 1998년에 마을 직영의 문학 기념관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다자이 사후 1950년(쇼와 25년)에 쓰시마 가문은 이 집을 매각했다. 마을 내 여관 경영자가 매입하여 다자이 오사무 문학 기념관을 병설한 여관으로 개조되어 다자이의 소설 '사양'에서 '사양관'이라고 명명되었다. 1950년부터 영업을 시작한 여관 '사양관'에는 다자이 팬들이 많이 숙박하러 왔으며, 그 안에는 찻집도 병설되어 있었다. 또한 문학 기념관은 숙박객 이외에도 공개되어 많은 다자이 팬들로 북적였다. 그러나 1988년(쇼와 63년)경부터 숙박객이 감소했으며, 더욱이 1990년(헤이세이 2년)에 소득세 신고 누락으로 1억 엔 남짓의 추징 과세를 받아 경영이 악화되었다. 이로 인해 경영자가 처분할 뜻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1996년(헤이세이 8년) 가나기초(당시)는 경영자로부터 사양관을 매입하여 마을 직영의 문학 기념관으로 재출발하게 되었다. 여관은 1996년 4월 7일에 폐업했으며, 1998년(헤이세이 10년), 명칭이 현재의 《다자이 오사무 기념관 '사양관'》으로 바뀌어 개장했다. 새롭게 개조된 사양관에서는 기존처럼 숙박은 할 수 없게 되었지만, 다자이의 문학 자료, 그리고 쇼와 초기 대지주였던 쓰시마 가문의 귀중한 자료를 전시하는 자료관으로서 많은 관광객, 다자이 팬들이 방문하고 있다. 관내에는 다자이가 애용한 문책상과 유품 등 귀중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또한, 다자이의 생애와 작품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음성 가이드도 준비되어 있다. 다자이 팬은 물론, 문학에 관심 있는 분, 역사에 관심 있는 분에게도 추천하는 관광 명소이다.